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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아테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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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라아테스 3세는 기원전 70년 또는 69년에 파르티아 왕국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로마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왕국 사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티그라네스 2세의 아들 소 티그라네스와의 관계를 통해 아르메니아에 개입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파르티아는 메소포타미아와 아디아베네를 재정복했지만, 로마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프라아테스 3세는 기원전 58년 또는 57년에 아들 오로데스 2세와 미트라다테스 3세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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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아테스 3세
기본 정보
프라아테스 3세의 드라크마, 에크바타나 조폐국 발행
프라아테스 3세의 초상이 새겨진 주화 앞면.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다. 기원전 62년경 에크바타나에서 주조됨.
이름프라아테스 3세
칭호위대한 왕
만왕의 왕
아르사케스
왕조아르사케스 왕조
종교조로아스터교
통치
직위파르티아 제국의 왕
재위 기간기원전 69년 – 기원전 57년
이전시나트루케스
계승미트리다테스 4세
가족 관계
아버지시나트루케스
배우자피리우스타나
텔레우니케
자녀미트리다테스 4세
오로데스 2세
이름 없는 딸
출생 및 사망
사망일기원전 57년

2. 어원

''프라아테스''(Φραάτηςgrc)는 그리스어로 표기한 파르티아어 ''Frahāt''(𐭐𐭓𐭇𐭕)이며, 이는 고대 이란어 ''*Frahāta-''("획득한, 얻은")에서 유래되었다. 현대 페르시아어 버전은 ''Farhād''(فرهادfa)이다.

3. 역사적 배경

파르티아의 왕 시나트루케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프라아테스 3세가 기원전 70년 또는 기원전 69년에 왕위를 계승했다.[1] 시나트루케스는 파르티아 통치자 미트리다테스 1세의 아들로 추정되며, 현대 역사학자 마레크 얀 올브리히트는 그가 파르티아 왕좌에 세운 아르사케스 분파를 "시나트루케스 왕조"라고 명명했다. 이들은 기원전 78/77년부터 서기 12년까지 파르티아 제국을 통치했다.

미트리다테스 2세가 사망한 후, 파르티아 제국은 혼란과 쇠퇴에 빠졌고 왕권은 약화되었으며, 제국은 주변국들에게 영토를 잃었다. 아르메니아의 아르타시드 왕 티그라네스 대왕은 파르티아의 약점을 이용하여 이전에 미트리다테스 2세에게 양도했던 "70개의 계곡"을 되찾았다. 그는 또한 아트로파테네 메디아, 고르디에네, 아디아베네, 오스로에네, 그리고 상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파르티아 식민지를 정복했다.[2]

4. 치세

프라아테스 3세는 기원전 69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근동 지역은 티그라네스 2세가 이끄는 아르타시에스 왕조의 아르메니아와 미트라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가 이끄는 폰토스 왕국이 강성하여 파르티아는 더 이상 최고 강대국으로 여겨질 수 없었다.[3]

그러나 같은 해, 로마 공화국의 사령관 루쿨루스가 티그라네스 2세를 시리아와 킬리키아에서 몰아내고 아르메니아로 후퇴시켰고, 미트라다테스 6세도 아르메니아로 피신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티그라네스 2세와 미트라다테스 6세를 북부로 몰아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프라아테스 3세에게 빼앗긴 파르티아 영토인 고르디에네, 아디아베네,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대가로 도움을 요청했다.[3]

기원전 66년, 프라아테스 3세는 루쿨루스의 후임 폼페이우스와 협상을 시작했는데, 폼페이우스는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메소포타미아, 아디아베네, 고르디에네에 대한 파르티아의 지배권을 로마가 인정하는 것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있다.[4]

프라아테스 3세는 그의 주화에 "왕, 신"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파르티아 왕 중 한 명이었다.[11] 그의 주화 앞면에는 사슴의 줄로 장식된 티아라헬레니즘 디아뎀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디아뎀 두 종류의 머리 장식을 사용했다.

기원전 58년 또는 기원전 57년, 프라아테스 3세는 아들인 오로데스와 미트라다테스에게 살해당했다.[16]

4. 1. 로마와의 관계

프라아테스 3세는 기원전 69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근동 지역은 티그라네스 2세가 이끄는 아르타시에스 왕조의 아르메니아와 미트라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가 이끄는 폰토스 왕국이 강성하여 파르티아는 더 이상 최고 강대국으로 여겨질 수 없었다.[3] 그러나 같은 해, 로마 공화국의 사령관 루쿨루스가 티그라네스 2세를 시리아와 킬리키아에서 몰아내고 아르메니아로 후퇴시켰고, 미트라다테스 6세도 아르메니아로 피신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3]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티그라네스 2세와 미트라다테스 6세를 북부로 몰아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프라아테스 3세에게 빼앗긴 파르티아 영토인 고르디에네, 아디아베네,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대가로 도움을 요청했다.[3]

이는 두 동맹국이 로마에 대항하여 파르티아에게 동맹을 설득하려 한 첫 번째 시도가 아니었다. 기원전 72년에 미트라다테스 6세는 프라아테스 3세의 아버지 시나투르케스에게 자신과 합류할 것을 요청했지만, 시나투르케스는 거절하고 중립을 유지했다.[3] 동시에 프라아테스 3세는 루쿨루스와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루쿨루스는 두 세력 간의 동맹을 제안했고, 이는 티그라네스에 대한 파르티아의 요구를 인정하겠다는 보장과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3] 프라아테스 3세는 양측에 약속을 한 듯 보이지만,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있었다.[3]

기원전 66년, 프라아테스 3세는 루쿨루스의 후임 폼페이우스와 협상을 시작했는데, 폼페이우스는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메소포타미아, 아디아베네, 고르디에네에 대한 파르티아의 지배권을 로마가 인정하는 것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있다.[4] 비슷한 시기에, 티그라네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티그라네스 2세는 아버지와 불화하여 프라아테스 3세의 궁정으로 도망쳤다. 그는 딸과 결혼하는 대가로 프라아테스 3세가 아르메니아 왕위를 차지하는 것을 돕기로 동의했다.[4] 기원전 66/65년에 이루어진 이 결혼은 프라아테스 3세에게 아르메니아 문제에 개입할 기회를 제공했다.[4] 프라아테스 3세는 티그라네스 2세와 함께 아르메니아로 원정을 이끌었다.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아르탁사타에서의 긴 포위 공격으로 인해 프라아테스 3세는 티그라네스 2세에게 아르메니아 원정을 맡기고 파르티아 병사들을 보강했다.[5] 결국 티그라네스 2세는 아버지에게 패배했지만, 프라아테스 3세를 버리고 폼페이우스에 합류했다.[6] 티그라네스 1세는 곧 폼페이우스에게 항복했고, 폼페이우스는 그에게 왕위를 유지하도록 했다.[7] 대신 티그라네스 2세는 소페네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다.[8]

그러나 짧은 통치 기간 후 티그라네스 2세는 투옥되어 로마로 추방되었다.[9] 기원전 65년 봄, 프라아테스 3세는 사위의 체포에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9]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65년 말경, 프라아테스 3세는 아디아베네, 고르디에네,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재정복했다.[10] 그러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의 공격으로 티그리스강까지 진격하면서 프라아테스 3세는 고르디에네를 잃었고, 로마인에 의해 티그라네스에게 반환되었다.[10]

프라아테스 3세는 다시 한번 로마인에게 항의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기원전 65/4년 겨울에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철수하고 폼페이우스가 미트라다테스 6세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자, 프라아테스 3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기원전 64년 초에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10] 프라아테스 3세는 결국 폼페이우스 및 티그라네스와 합의를 보았다. 메소포타미아와 아디아베네는 파르티아 영토로, 고르디에네는 아르메니아 영토로 확인되었다.[10] 게다가 프라아테스 3세와 티그라네스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10]

4. 2. 아르메니아와의 관계



프라아테스 3세는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가 미트리다테스 2세에게서 빼앗았던 "70개의 계곡"을 되찾고, 아트로파테네 메디아, 고르디에네, 아디아베네, 오스로에네,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파르티아 식민지를 정복하는 등 파르티아의 약점을 이용했다.[2]

기원전 69년, 프라아테스 3세는 근동에서 티그라네스와 그의 동맹 미트라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가 이끄는 폰토스 왕국에 의해 아르메니아가 득세하면서 더 이상 최고 강대국으로 여겨질 수 없는 제국을 물려받았다.[3] 그러나 같은 해, 로마 공화국의 사령관 루쿨루스가 티그라네스를 시리아와 킬리키아에서 몰아내 아르메니아로 후퇴하게 했고, 그곳에서 미트라다테스 6세가 그와 함께 피신했다.[3] 루쿨루스는 이후 아르메니아로 진격했고, 성공하여 티그라네스와 미트라다테스 6세는 국가 북부로 물러나 빼앗긴 파르티아 영토인 고르디에네, 아디아베네,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대가로 프라아테스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3]

이는 두 동맹국이 로마에 대항하여 파르티아와 동맹을 맺으려 한 첫 번째 시도가 아니었다. 기원전 72년 미트라다테스 6세는 프라아테스 3세의 아버지 시나트루케스에게 자신과 합류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중립을 유지했다.[3] 동시에 프라아테스 3세는 루쿨루스와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그는 두 세력 간의 동맹을 제안했고, 이는 티그라네스에 대한 파르티아의 요구를 인정하겠다는 보장과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3] 프라아테스 3세는 양측에 약속을 했지만,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남아 있었다.[3]

기원전 66년, 프라아테스 3세는 루쿨루스의 후임 폼페이우스와 협상을 시작했는데, 폼페이우스는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메소포타미아, 아디아베네, 고르디에네에 대한 파르티아의 지배권을 로마가 인정하는 것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있다.[4] 비슷한 시기에, 티그라네스의 아들 겸 후계자 티그라네스 2세는 아버지와 불화하여 프라아테스 3세의 궁정으로 도망쳤다. 그는 딸과 결혼하는 대가로 프라아테스 3세가 아르메니아 왕위를 차지하는 것을 돕기로 동의했다.[4] 기원전 66/65년에 이루어진 이 결혼은 프라아테스 3세에게 아르메니아 문제에 개입할 기회를 제공했다.[5] 프라아테스 3세는 티그라네스 2세와 함께 아르메니아로 원정을 이끌었다.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아르탁사타에서의 긴 포위 공격으로 인해 프라아테스 3세는 티그라네스 2세에게 아르메니아 원정을 맡기고 파르티아 병사들을 보강했다.[5] 결국 티그라네스 2세는 아버지에게 패배했지만, 프라아테스 3세를 버리고 폼페이우스에 합류했다.[6] 티그라네스 1세는 곧 폼페이우스에게 항복했고, 폼페이우스는 그에게 왕위를 유지하도록 했다.[7] 대신 티그라네스 2세는 아버지가 죽은 후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르도록 보장받고 소페네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다.[8]

그러나 짧은 통치 기간 후 티그라네스 2세는 투옥되어 로마로 추방되었다.[9] 기원전 65년 봄, 프라아테스 3세는 사위의 체포에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9] 기원전 65년 말경, 프라아테스 3세는 아디아베네, 고르디에네,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재정복했다.[10] 그러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의 공격으로 티그리스강까지 진격하면서 프라아테스 3세는 고르디에네를 잃었고, 로마인에 의해 티그라네스에게 반환되었다.[10]

프라아테스 3세는 다시 한번 로마인에게 항의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기원전 65/4년 겨울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철수하고 폼페이우스가 미트라다테스 6세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자, 프라아테스 3세는 기원전 64년 초에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10] 프라아테스 3세는 결국 폼페이우스 및 티그라네스와 합의를 보았다. 메소포타미아와 아디아베네는 파르티아 영토로, 고르디에네는 아르메니아 영토로 확인되었다.[10] 또한 프라아테스 3세와 티그라네스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10]

4. 3. 주화와 제국 이념

프라아테스 3세는 그의 주화에 "왕, 신"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파르티아 왕 중 한 명이었다. 이 칭호를 처음 사용한 파르티아 왕은 미트라다테스 1세였다. 이 칭호는 파르티아 군주들 사이에서는 흔하지 않았으며, 이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파르티아 통치자는 미트라다테스 4세였다.[11] 프라아테스 3세는 ''에피파네스'', ''테오파토르'', ''유파토르'' 등의 칭호도 사용했다. 현대 역사가 에드워드 돔브로바에 따르면, 이러한 칭호는 파르티아인들이 "신성한 조상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또는 그들 자신의 신성한 지위로" 왕위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2] 프라아테스 3세는 또한 왕 중의 왕과 대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다른 파르티아 왕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최초의 파르티아 통치자 아르사케스 1세의 이름을 따서 그의 주화에 ''아르사케스''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심에서 파르티아 군주들 사이에서 왕족의 명예 칭호가 되었다.

그의 주화 앞면에서, 프라아테스 3세는 두 종류의 머리 장식을 사용했다. 하나는 사슴의 줄로 장식된 티아라이고, 다른 하나는 헬레니즘 디아뎀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디아뎀이다. 그의 사후, 티아라는 한동안 파르티아 주화에 나타나지 않았다. 프라아테스 3세의 주화는 파르티아의 봉신 왕국 페르시스에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스의 왕 파코르 1세는 프라아테스 3세의 주화 앞면에 사용된 것과 같은 헤어스타일을 채택했다.

프라아테스 3세의 테트라드라크마 뒷면에는 전통적인 앉아 있는 궁수의 모습이 변경되어 묘사되어 있다. 그는 소매가 있는 코트 대신 프라아테스 3세가 그의 주화 앞면에 착용한 것과 같은 깃 없는 튜닉을 입고 있다. 현대 역사가 베스타 사르코시 커티스에 따르면, "뒷면의 궁수는 이제 앞면의 왕과 분명히 동일한 인물이다." 그리스 신 제우스의 독수리와 유사한 새가 앉아 있는 인물의 손에 추가되었다. 파르티아 시대에 이란인들은 자신들의 신성한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헬레니즘적 도상학을 사용했으며, 따라서 독수리는 아베스타베레트라그나, 즉 왕실 매와 연관될 수 있다.

5. 죽음과 계승

기원전 57년경, 프라아테스 3세는 그의 두 아들인 오로데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4세에게 살해당했다. 오로데스 2세는 처음에는 형인 미트리다테스 4세를 지지했지만,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수렌 가문의 지지를 받은 오로데스 2세는 형을 물리치고 기원전 55년에 파르티아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6. 유산

프라아테스 3세는 기원전 91년 미트리다테스 2세 사후, 파르티아 왕국을 이전의 국제적 지위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최초의 파르티아 군주였다.[1] 그는 이 노력에 통치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그는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아디아베네와 같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는 노력에서 부분적으로 성공했다.[2] 티그라네스 사후 기원전 55년 그의 아들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 아르메니아에 대한 야망은 그의 아들 오로데스 2세에 의해 계속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3]

7. 가족

프라아테스 3세는 피리우스타나와 텔레우니케라는 아내를 두었다.[1] 슬하에 미트라다테스 4세와 오로데스 2세라는 아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 딸은 티그라네스 대왕의 아들 티그라네스 소(小)왕과 결혼했다.[3]

7. 1. 결혼

프라아테스 3세의 아내들은 모두 바빌로니아 점토판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다.[1]

아내
피리우스타나
텔레우니케


7. 2. 자녀

이름설명
미트라다테스 4세파르티아의 왕 (기원전 57년 ~ 54년).[1]
오로데스 2세파르티아의 왕 (기원전 57년 ~ 37년).[2]
이름 미상티그라네스 대왕의 아들인 티그라네스 소(小)왕과 결혼.[3]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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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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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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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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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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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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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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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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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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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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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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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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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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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デベボイス
[15] 서적 デベボイス
[16] 서적 デベボイ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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